2026년 8월 15일꽃작업 이야기
모네 꽃다발, 양산을 쓴 여인이 어머니의 환갑 꽃다발이 되기까지

지난 8월, 모네 꽃다발 주문을 받았습니다. 주문서를 읽다가 조금 소름이 돋았어요. 9월부터 시작하는 월간 플로리에스텔의 첫 화가가 바로 모네였거든요. 마침 샘플 작품과 강의 공지를 준비하던 참에 모네 꽃다발을 만들 기회가 온 거죠.
남매 분이 보내온 주문서
환갑을 맞은 어머니를 위해 남매 분이 서프라이즈로 주문해 주셨습니다. 주문서에 어머니 이야기가 꼼꼼하게 적혀 있었어요.
어머니는 3년 전부터 꽃꽂이를 배우고 계시고, 제 릴스도 즐겨 보신다고 했습니다. 흔한 꽃보다는 특이한 꽃을, 싱싱하고 선명한 꽃을 좋아하시고, 진한 보라색을 좋아하신다고요. 원하시는 색은 퍼플과 라벤더.
그리고 한 줄이 더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클로드 모네의 〈수련〉과 〈양산을 쓴 여인〉을 좋아하세요.

두 그림 중에 저는 〈양산을 쓴 여인〉을 표현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풍경에 섞이면서도 분명한 한 사람
1875년, 모네가 아르장퇴유의 언덕에서 아내 카미유와 아들 장을 그린 그림입니다. 빛과 바람, 푸른 하늘의 색. 그리고 풍경에 섞여드는 듯하면서도 분명히 그 자리에 서 있는 한 여인.
그림 속 카미유는 아름답기만 합니다. 하지만 그녀의 삶에는 고통의 순간이 참 많았어요. 넉넉하지 않은 화가의 아내로 살았고, 서른둘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저는 모네가 사랑했던 카미유의 모습에 자녀들이 존경하고 사랑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겹쳐보고 싶었습니다. 가족을 위해 전업주부로 살아온 시간. 그리고 3년 전부터 자신을 위해 꽃을 배우기 시작한 어머니. 풍경 속에 녹아 있으면서도 그 존재가 분명한 사람이요.

그림 속 흰색은 흰색이 아닙니다
그림을 오래 들여다보면 카미유의 흰 드레스가 순백이 아닙니다. 하늘을 받은 쪽은 푸르고, 그늘진 쪽은 보랏빛이에요. 구름에도 풀밭에도 파랑이 스며 있고요. 모네에게 흰색은 빛이 닿는 자리였던 것 같아요.
이번에 쓴 소재는 화이트 호접란, 염색 시베리아백합, 수국, 안개, 옥시페탈럼, 보리사초, 염색 미스티블루, 미리오, 팜파스, 탈색 아스파라거스 등입니다. 그리고 몇 가지는 받은 그대로 쓰지 않고 색을 한 번 더 입혔습니다.

중심에 둘 화이트 호접란은 꽃잎 끝부터 푸른 기를 올렸습니다. 안쪽으로 갈수록 흰색이 남도록요. 하늘을 받은 드레스처럼 보이게 하고 싶었어요.

흩날리는 선을 만들 탈색 아스파라거스에도 민트빛을 살짝 뿌렸습니다. 이 가지들이 꽃다발 위로 뻗어 나가면서 바람의 결을 만들어 줍니다.
호접란을 중심에

잡을 때 기준은 하나였습니다. 크고 하얀 호접란이 작품의 중심에서 또렷하게 보일 것.
둘레에는 수국과 염색 시베리아백합, 옥시페탈럼, 안개를 채우고, 팜파스와 보리사초, 탈색 아스파라거스처럼 가볍고 가는 선 소재는 위로, 옆으로 흩어지게 뻗었어요. 모네의 빛과 바람과 색은 푸른 꽃과 흩날리는 선이 맡고, 호접란은 그 풍경 한가운데 서 있는 사람이 되는 구조입니다.
그림에서 카미유가 딛고 선 언덕의 풀밭도 빼놓지 않았어요. 초록빛이 도는 미스티블루와 미리오가 그 풀밭이 되어 줍니다.
꽃이 많아질수록 주인공은 풍경에 묻히기 쉽습니다. 이 꽃다발은 그러면 안 됐어요. 담고 싶었던 게 풍경 속에서도 분명히 존재하는 한 사람이었으니까요.

포장에는 라벤더색 오간자 원단을 넣었습니다. 라벤더를 요청해 주셔서, 푸른 꽃들 사이로 보랏빛이 비치도록 감쌌어요.

꽃 사이에는 〈양산을 쓴 여인〉 그림 카드를 함께 넣었습니다.

버스를 타고 부산까지
완성된 꽃다발은 아드님이 직접 픽업하러 오셨어요. 연휴라 KTX 표를 못 구하셔서, 이 큰 꽃다발을 안고 버스로 부산까지 가져가셨습니다. 정말 감동이었어요.
한 화가가 사랑했던 여인의 장면이 자녀들이 사랑하는 어머니의 환갑 꽃다발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꽃을 만들다 보면 종종 생각합니다. 특별하지 않은 개개인의 삶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누구에게나 작품이 될 만한 빛나는 장면이 있다고요. 저는 그 장면을 발견하고, 예술과 연결하고, 꽃의 색과 형태와 선으로 표현하는 일을 참 좋아합니다. 꽃은 그렇게 한 사람의 삶을 작품으로 만드는 매개체가 될 수 있으니까요.
어머님의 환갑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그리고 이렇게 아름다운 가족 고객님, 제게 맡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삶의 한 장면이 꽃을 통해 작품으로 태어나는 과정이 궁금하시다면, 월간 플로리에스텔에서 매달 함께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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